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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로 테마기행

상화로 관련 기록들을 테마로 엮어 주제별로 둘러보세요.

팔곡철공소와 부활호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상인동 252번지 일대(상인동 홈플러스 맞은편) 3,300평에는 팔곡철공주식회사, 일명 ‘하찌 야’라 불리던 비행기 부품 생산업체가 있었습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징병·징용 및 공출 등 전시 비 상체제를 가동하면서 가미카제 특공대의 소 비행기를 제작할 목적으로 기계공업이 발달해 있던 대구 북성로에서 철 공소를 찾았고, 이를 월배면으로 옮겨 비행기 부품을 만들었다 합니다. 초기에는 남자 100명, 여자 30명, 소학교를 졸업한 12∼20세의 청소년을 선발하여 3개월간 기계공원 양성교육을 시 키고,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공장 근무 후 교양실에서 각종 기술교육과 수양[도덕], 강화[말하기] 등을 가르쳤습 니다. 임금은 13세 이하의 경우 0.31∼0.48엔, 19세 이상의 경우 1.08엔으로 차등을 두었습니다. 공장동 2개와 기숙사 3개 동이 있었는데, 현재 기숙사동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해방 이후 공장 부지는 2년제 기술학교와 항공대학, 경상공 업고등학교가 개교하여 인재 양성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부활호는 1953년 6월 공군이 주도하여 개발한 국내 최초의 군용기로 ‘부활’이라는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으 로 무너진 대한민국을 부활시켜라’라는 의미로 지어 붙인 것입니다. 연락, 정찰, 심리전 등의 다목적 항공기로 단 1대 만 만들어져 운용되다가 1960년 김해기지에서 폐기하려던 것을 상인동의 ‘한국항공대학’에서 기증받아 제작 실습용 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66년 항공대학 폐교 후 사람들 기억에서 잊혔던 부활호는 2004년 경상공업고등학교 제도실 건물 지하창고에서 뼈 대와 프로펠러를 발견, 복원 작업을 거쳐 2011년 6월 추가로 2기가 제작되어 시험비행을 완료하였습니다. 복원된 ‘부 활호’는 현재 공군사관학교에 있으며, 경상공고에는 그 모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항일 독립운동, 구국운동 명소

일제강점기, 전국에서는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들 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상인동 일대에서도 1919년 3.1만세 운동을 전후하여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중 대표적인것이 ‘한국유림파리장서사건’과 ‘조선 국권회복단’의 항일 독립운동이다. ‘조선국권회복단’은 구한말 애국지사였던 향산 윤상 태 선생이 1915년 조직한 비밀결사체이다. 송석헌은 윤상태 선생이 후진교육을 위해 건립한 건물로 독립 운동가들의 밀회 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월곡역사공원 안에 있는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 서비’는 조선의 독립을 탄원하는 문서에 서명하며 구 국운동에 앞장선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일제강점기에 전국 유림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탄원 하는 문서에 서명하여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 의에 제출했다. 이때 지역에서 서명한 이가 7명이나 되었으며, 관련자는 옥사하거나 망명했다. 5명이 서 명한 월촌은 일경의 만행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한다. 항일운동에 앞장선 학생들을 기념하는 유적도 있다. 바로 ‘태극단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다. 일제강점기 에 우리나라 독립을 외친 학생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 리기 위해 세운 탑으로,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생이 중심이 된 태극단은 총칼 앞에 굴하지 않고 일제에 당 당히 맞섰다. 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 왜적의 모진 손톱이 겨레의 숨결마저 끊으려 할 즈음 항거의 칼을 잡고 일어선 봉오리… 뜻은 오직 조 국의 독립에 있었고, 길은 다만 죽음을 각오할 따름이 었다. … 고구려의 맥박이 이곳에 뛰고, 신라의 목소 리가 여기서 울린다. 태극단 그 이름 길이길이 이 땅 에서 푸르리라.“

시인의 길, 상화로
이야기 꽃
이 피다.

2020년 상화로는 진천천 물길을 품었습니다.
상화로 8차선 도로 아래 여전히 물길은 유유히 흐르고,
그 양 옆으로는 대곡동, 도원동, 상인동, 진천동 네 개 동네가 접해 있습니다.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각양각색 동네들이 전통과 역사를 지키고 보존하며,
혹은 새로운 문화를 아우르고 수용하며 저마다 도시 이야기를 꽃 피우고 있습니다.

2025.03.22  Sat. Archive
오늘의 상화로 아카이브
장소

일제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마자 식민지 조선의 각 소학교에 ‘청년훈련소靑年訓練所’를 병설하였다. 청년훈련소는 원래 서울을 비롯한 인천 · 개성 등지에서 일본인들의 제국재향군인분회장帝國在鄕軍人分會長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 말기에 들어 한국인을 강제 동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청년훈련소를 개설하게 되었다. 농촌의 청소년 자원을 징병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교장 이하 전 교사가 동원되어 학과 및 직업 과목 그리고 군사훈련과목을 담당한 예비병 훈련소 성격의 기관이었다.

인물

1882년 9월 30일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에서 출생(부 윤희순尹羲淳과 모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1남 3녀 중 1남,자는 성민聖玟 또는 성천聖天, 호는 향산香山, 아명은 주경周經, 윤상우尹相佑라 하다 윤상태尹相泰로 개명) 고종 37년(1900) 3월 5일 숭령전崇靈殿 참봉參奉, 고종 39년(1902) 승훈랑承訓郎, 고종 42년(1905) 1월 17일 거제군수巨濟郡守(군내 일진회원一進會員들의 불법행동을 보고 추방함. 1906년 큰 흉작으로 군민의 곤궁이 심할 때 상부의 허가 없이 역둔驛屯 벼를 빈민들에게 나누어 줘 면직되었으나 그해 8월 12일 징계가 해제됨.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국권이 침탈당함을 보고 복직하지 않고 부 윤희순과 함께 고령군 성산면 우곡동으로 은거, 후일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으로 이거함) 1913년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를 가장하여 열린 재건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에 참여

유물

700년 전 정도전의 난을 피해 월촌 마을에 입촌하여 단양우씨의 뿌리를 내린 우홍명禹洪命의 손자인 정략장군政略將軍 우전禹奠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종중에서 건립하였다. 그는 후손들에게 정치권력이란 뜬구름 같은 것이므로 권력을 탐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당부하여 초야에 묻혀 지냈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으로 이 마을 출신 중에는 권력의 세도를 부린 자도, 천석의 부를 누린 갑부도 찾아보기 힘 든다. 이 비는 오석으로 된 높이 303㎝, 폭 106㎝, 두께 6㎝, 비개는 청백색 화강암 용머리 방형으로 높이 91㎝, 가로 152㎝, 세로 91㎝이다. 귀부는 높이 91㎝, 가로 258㎝, 세로 333㎝이다.